<불확실한 학교>에 대한 불완전한 노트

<불확실한 학교>에 대한 불완전한 노트 

최태윤

2016년 여름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불확실한 학교> 작업은 이제까지 해 왔던 프로젝트와 눈에 띄게 달랐다. <불확실한 학교>는 마치 리허설 없이 막 올린 연극처럼 배우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배역을 개선해 나가고 그 과정 속에서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참가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아름다운 만남의 순간과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지금은 2016년 10월로, 모든 워크숍과 세미나가 끝났고 참가자 전시는 계속되고 있다. 전시가 끝나는 11월 말까지 몇 가지 행사가 아직 남아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그 동안 내가 쓴 작업 노트와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 녹취록들을 다시 들춰보며, <불확실한 학교>의 참가자, 협력자, 강사, 코디네이터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하는 편지로 이 글을 써 본다.

특별한 감각과 각기 다른 의사소통 방식, 움직임,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불확실한 학교>에서 모였다. 협력 기관인 잠실창작스튜디오와 로사이드, 개인 후원자들이 총 20여 명의 참가자를 추천하였다. 작가, 사회복지사, 활동가, 장애인, 비장애인 등으로 다양하게 섞여 참가하였다. <불확실한 학교>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의 커미션 프로젝트이며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을 중심으로 하여 본관과 분관에서도 진행되었다. 협력 작가들을 초대하여 참가자 지원과 진행 과정의 기록에 도움을 받았다. 워크숍은 참가자를 대상으로 진행했고 세미나는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다. 교과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졌는데,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스토리텔링 중심의 테크놀로지 관련 워크숍 5회,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과 함께 현대 사회에 관한 비판적 주제를 다룬 세미나 5회, 참가자들의 전시 준비를 위한 세션 3회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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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탈학습

‘탈학습’이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억에서 벗어남. 그 효과를 없애고 습관을 버리는 것’ [1]을 의미하는 단어로, 나는 왜곡된 지식과 제도적 권력 구조에 도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비일상적 상황 속에서 진정한 학습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사람은 저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르다. 신뢰가 있어야 학습이 가능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학교는 이 같은 개인별 다양성을 충분히 이해해 주지 않고, 교과 과정과 교육을 표준화한다. 학교는 개인들의 언어와 의사소통 방식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수업을 하면서 탈학습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3년 뉴욕에서 시작한 시적연산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는 작가가 운영하는 학교이며 예술, 테크놀로지, 시(詩), 코드에 중점을 두고 교육한다. 나는 공동설립자이며 직접 교육자로서 여러 교사들과 협력하면서 교육 방식과 교과 과정을 실험해 왔다. 여기서 얻은 경험이 사회적 소수 그룹의 테크놀로지 독해력에 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사 중 한 명인 사라 헨드렌은 테크놀로지와 장애에 관해 연구하도록 영감을 주기도 했다. 지난 2015년에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우리가 세운 벽을 탈(脫)학습 하기>라는 워크숍을 기획하고, 참가자들과 함께 탈학습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2016년 브릭(BRIC, 뉴욕 브루클린 비영리 예술/미디어 공간)에서는 <사이닝 코더스(Signing Coders)>라는 워크숍을 기획하여 농인 학생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쳤고, 파이어니어 웍스(Pioneer Works)에서는 <장애의 탈학습(Unlearning Disability)>이라는 제목으로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백지숙 미디어시티서울 2016 예술감독이 여름 캠프 기획자로 초청했을 때, 나는 ‘비엔날레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학교’라는 개념으로, 다양한 학생들이 다가올 수 있고,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고자 했다.

또한 동료인 크리스틴 선 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난 몇 년 동안 함께 퍼포먼스와 오브제 작업을 진행해왔다. 우리는 작업에서 종종 시간의 유연성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선천적으로 농인인 크리스틴의 작업은 듣지 못하는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수화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그녀는 테크놀로지를 예술적 힘으로 사용하여 소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탈학습에 관한 나의 생각은 그녀의 실천적 작업과 입장에서 영향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시각 언어의 자리가 불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위치를 탐구하는 데 사용하는 두 가지 도구인 소리와 성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우리 농인의 언어를 정당화해야 한다고 종종 강하게 느낀다. 소리를 둘러싼 사회적 시각과 에티켓의 탈학습에 관한 내 작업은 여기에 근원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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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과 과정

<불확실한 학교> 워크숍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변수나 함수 개념 같은 컴퓨테이션의 기초를 가르쳤다. 일부 워크숍 자료는 시적연산학교와 <사이닝 코더스> 워크숍에서 개발한 교과 과정에서 가져왔다. 수업에 협력할 협업 교사들도 초청했다. 우리는 p5.js라는 자바스크립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여 코드 샘플을 만들었고, 매핑이나 정보 시각화같은 흥미로운 디자인 활동을 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영화감독 이길보라와 공동으로 진행한 마지막 세션에서는 비디오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을 다루었다.

내가 미술 작업에 코드를 활용하는 것은 추상과 반복이라는 시스템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코드를 테크놀로지이기 이전에 언어의 형태로 보고 접근한다. 그리고 불 논리(Boolean logic)를 카드 게임이나 몸 움직임으로 표현하도록 연습했다. 기술적인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코드를 가르쳤다. 코드의 종류는 실용적인 것에서 난해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코드를 낯설고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사람들 사이에 코드가 공동의 언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드는 사람을 차이에 기반해 차별하지 않는 언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불확실한 학교> 세미나는 예술, 테크놀로지, 몸, 환경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었다. 세미나에서는 비엔날레 참여 작가 일곱 명을 선보임으로써 비엔날레를 세미나의 자원으로 활용했다. 수많은 작가들이 비엔날레에 초청되지만, 이들이 지역 공동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적다. 그래서 전시 작가들이 이 세미나를 통해 <불확실한 학교> 프로젝트 참가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참가자들은 작가들을 만나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세미나는 일반인에게도 등록하면 참여할 수 있게 개방되었다. 총 20명에서, 공공 공간에 개입하는 행사의 경우에는 40명 정도까지가 참여했다. 모든 세미나는 한국어 수화 번역과 문자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여 장애인의 접근성을 높였다.

나타샤 니직의 세미나 ‘역사와 동시대성’은 자연적 재난과 개인적 재난의 연관성 문제를 다루었다. ‘재난과 자연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세미나에서 소이치로 미하라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관점에서 에너지와 인간 삶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에두아르도 나바로의 세미나 ‘한계가 아닌 가능성’에서는 서로 다른 감각들의 체화와 시간에 대한 지각에 대해 논의했고, 주황은 ‘의상을 입어라’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젠더와 재현의 문제를 다루었다. 홍승혜 작가의 세미나 ‘나의 개러지 밴드’는 테크놀로지와 아마추어의 제작/생산에 주목했다.

사라 헨드렌과 앨리스 셰퍼드는 ‘램프와 접근성 매핑’ 세미나에서 휠체어 사용자들의 접근성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는 서울의 장애인 행동 단체인 노들야학 선생님과 학생들을 초청해, 총 40명이 북서울미술관 근방 걷기 투어에 참여했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이들과 두 다리로 걷는 이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함께 걸어가는 투어를 통해 우리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미묘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요소를 관찰하는 법을 익혔다. 올바른 움직임에 관한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회였다. 노들야학의 한 참가자는 “우리는 늘 그룹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몸은 아니다. 우리가 함께 걸으면 우리 몸은 공간에 확장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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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불가능

<불확실한 학교>는 여러 가지 다른 언어 사이의 번역과 의사소통 방식에 있어서 독특한 도전을 마주해야 했다. 번역은 말의 의미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 이상의 행위이다. 그것은 두 언어와 각 언어의 감각들에 모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일이다. 청인(聽人)은 대체로 수화나 구화법에 대한 경험이 없다. 사람들은 보통 말을 느리게 혹은 빠르게 하는 사람, 작게 또는 크게 말하는 사람, 독특한 액센트를 사용하는 사람을 참을성 없이 대한다. 포용은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모든 수업은 한국어 수화와 실시간 자막 서비스를 갖추고 진행되었다. 실시간 자막은 농인, 청각 장애인과 청인 모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수업의 경우, 영어-한국어 통역사, 수화 통역사 두 명, 속기사, 어시스턴트 등이 동원되어 힘을 합쳐야 했다. 번역을 위한 이러한 노력이 연극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참가자들 중에는 자폐 증상을 가진 이들과 다운증후군 장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구두 의사소통에는 제약이 있지만 그림과 글쓰기로 의사소통을 하고, 때로는 가족과 전문 활동 보조인의 도움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이처럼 번역은 모든 이들에게 현재 진행 중인 하나의 과정이었다.

공동체는 단수적 존재들의 성과도 아니고 그들의 작용 자체도 아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그들의 존재—공동체의 한계에 매달린 그들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통이란 사회적·경제적·기술적·제도적 과제에서 벗어나 무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3]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사람들로서 만났다. 모든 사람들의 언어를 해석하지 않은 선험적인 상태에 집중하면 모든 이들의 존엄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사소통 방식, 학습 방식, 만드는 방식과 존재 방식이 허용되는 포용적인 환경이다. ‘정보의 번역’에서 ‘감정의 전달’로 전환되는 순간, 바로 거기에서 공동체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번역 불가능한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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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호의존성

도시 안에 수많은 벽이 존재한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담, 계단, 도로 경계석 같은 물리적인 벽이 있는가 하면, 은밀한 편견, 고정 관념, 폄하적 언어 같이 상대적으로 비가시화 된 벽들도 있다. 이런 벽들이 서로 얽혀 있고, 이들이 내부와 외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산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책은 편안한 활동이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성 사회에서 정상으로 여기지 않는, 신체와 움직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산책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들에게 산책은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 공간을 어렵게 점유하는 일이다. 이들이 커다란 벽을 우회해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벽은 이들의 걷기를 방해하고 감정의 짐을 지운다. 예를들어 서울에서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도시 내에 가득한 접근 불가능하고 위험한 도로와 타협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적대감과 냉랭한 거부를 감내해야 한다. 왜냐하면 벽은 정상 상태와 독립성에 관한 그릇된 믿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버틀러: 걷는 기술도 없이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걷는 것을 보조해 주는 우리 외부의 무언가 없이 그저 걷는 사람은 없죠. 어쩌면 비장애인이 철저하게 자족적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개념일 겁니다.

[…]

S. 테일러: 사실 우리는 모두 상호의존적인 존재인데 장애인만 의존적인 존재라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의존적인 존재라고 보는 인식이 있어요. 장애인은 비장애인과는 상이한 구조에 기대어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라고 보는 거죠.[4]

“우리가 걸을 수 있게 돕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미술관에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능력은 무엇인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접근성을 도와주는 것은 무엇인가?” 또 “우리가 사회에 존엄성을 유지하며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역량은 무엇인가?”로 해설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상호의존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벽을 허물고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지지 구조물(support structures)을 세울 수 있다. 정의를 일상적 삶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에 사는 사람은 장애물 없이 산책할 수 있어야 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지지 구조는 변형의 문법이고 모든 대상에 잠재하는 관계적 시스템이다. 지지 구조물은 주어진 현상이나 개별적 사건을 변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결정하는 요인에 개입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다. 지지 구조물은 결정 요인들이 처음부터 발생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5]

<불확실한 학교>의 참가자들과 협력자들이 함께 만든 참가자 전시 <상호의존>에서는 회화, 드로잉, 도자기, 출판물, 프로세스 다큐멘터리와 비디오 등을 선보였다. 전시 주제 ‘상호의존’은 작가들의 독특한 감각과 언어들에 주목했다.

〈불확실한 학교〉 참가자 전시 <상호의존>에서는 〈불확실한 학교〉 참가자들의 작품과 학교 프로그램의 과정을 소개한다. <상호의존>은 우리 고유 불완전함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포용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또한 〈불확실한 학교〉 강사와 참가자, 협력 작가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급진적 호혜’를 관람객과 나누는 자리이다. 상호의존의 잠재력은 각자가 혼자였을 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공동의 역량으로 가능해지는 데에 있다. [6]

협력 작가 소목장세미는 전시 공간을 디자인했다. 모든 작품은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의 구조로 설치되어 있고, 전시는 오픈 스튜디오 형식으로 꾸며졌다. 참가자들의 영상 작업과 라야의 <불확실한 학교> 다큐멘터리는 전시 기간 말미에 상영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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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화

<상호의존> 전시는 일련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프리젠테이션과 토론을 위해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두 번의 단체 미팅을 가졌다. 편안한 분위기의 소규모 모임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작업과 장애가 가지는 연관성에 관한 솔직한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아래 대화는 <불확실한 학교>의 핵심적 본질을 보여준다.

이영익(작가): 제가 청각장애인이다 보니까, 건청인들하고 대화할 때는 필담과 구화로 대화해요. 대화할 때는 항상 입 모양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항시 얼굴에서 떼지 못하다 보니까 얘기 나눌 때마다 표정의 변화가 자연스레 제 눈에 들어오게 돼요. 그러다 보니 얼굴에서 떠오르는 표정과 눈빛을 읽으며 상대가 지금 어떻고, 어떤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근데 그렇게 보더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파악한 게 아니잖아요. 자신이 놓친 또 다른 면을 다른 누군가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속내를 들킬까 봐 감추려고 하거나 연기를 하려는 사람도 있겠죠. 이처럼 자신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는 게 보였어요. 그걸 유리 위의 영상과 투과된 영상, 그리고 투과된 영상에 가려진 초상화로 나타낸 거예요.

이유진(작가): 사람마다 보는 시야가 다르잖아요. 예를 들면, 제가 소리가 없는 공간에 살고 있고, 다른 사람은 소리가 들리는 공간에 살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색이 없는 공간에 살고 있잖아요. 각자 보는 시야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공간들이 충돌하거나, (발생하는) 연결고리를 이 전시의 컨셉트로 잡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민희(작가): 저는 다양하게 음악을 들었어요. 그 소리에 제 무의식적인 상처가 녹아나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전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다’라는 말을 좋아하고 공감합니다. 제 어둠 안의 빛, 희망을 찾는 작업을 앞으로 하고자 합니다.­

김예림(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 저희는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에 자폐성이랑 뚜렛 증후군이 있는 어떤 분이 있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은 공격적이고 위험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많이 갖고 있기도 했고, 사회복지사들도 어떤 언어적 소통이 어려워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 분이 저희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말들을, 평소에는 말을 안 하시는데 이런 언어들을 쏟아내는 걸 보고 놀라게 되었어요. 현재 그 분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유롭게 소통을 하고 있어요.

참가자들 중에는 전문적인 작가, 작품이 곧 표현과 의사소통 형식인 ‘창작자’, 교육자, 사회복지사, 장애인의 가족들이 포함되었다. 자연히 각자 장애와 갖고 있는 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부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자신의 장애와 연관되지 않기를 강하게 원했고,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장애와 그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 서로 다른 의견과 충돌은 예술과 장애라는 개념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민희(작가): 제가 느끼는 건데, 작가는 작가로서 존재하는 대로 충실히 작업하면 된다고 봐요. 시대적으로 미술계 안에서도 장애라는 말은 없어요. 그냥 우리 스스로 의식해서 생긴 문화인 것 같아요. 그걸 의식해봤자 자기가 힘든 거잖아요. 전 그냥 그림 그 자체, 작품 그 자체, 그거 같아요. 옛날에 사람들, 초기 (작업실) 멤버들과 얘기했을 때도 장애 그런 거 말고 사람과 사람의 그 작업을 봤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장애라는 말을 썼을 때 제가 되게 심하게 말했거든요. 그런 거 없다, 다 우리가 만든 장애물이다. 선을 그을 때도 누구나 삐뚤 빼뚤 그리잖아요. 얼마 전에 큐레이터들도 만났는데 에이블 아트, 장애인 예술 그런 거 없대요. 그냥 그림, 그냥 사진이라고요.

김예림(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 저는 이제 장애라는 게 저는 부정적인 요소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다른 거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도 그런 것들 얘기하기가 너무 어렵죠. 저 같은 경우는 그런 것들을 같이 얘기하고, 이 사람이 오히려 사회에 나가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장애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이 다시 해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 말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보다는 정말 실제로 있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얘기하고 나눠야 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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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안정

세상은 확정성에 기반하여 운영된다. 시간과 공간의 정확성이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은 의심의 여지 없이 고정되어 있다. 학교 시스템의 경우 교사와 학생 또한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들은 자의적인 것일 뿐이다. 배움은 거리, 시위, 공원, 도시의 불확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연인, 친구, 가족, 낯선 타인들에게서 배움을 얻는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 의존적인 세계에 접어들었고, 어느 정도는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7]

<불확실한 학교> 프로젝트 참가자들 사이에 오가던 농담이 하나 있다. 한 참가자가 <불확실한 학교>를 ‘불안한 학교’라고 잘못 적으면서 시작되었다가 그들 사이에 농담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의 주변을 맴도는 양상을 콕 짚어냈다는 점에서 이것은 웃음을 자아냈다. 또 이 말은 우리 존재 안에 내재하는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를 드러냈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곧 알지 못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확실성은 확실한 것, 구체적이고 안정적이며 견고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여겨지는 것들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학교>는 불안정하고 알 수 없는 공간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실수를 하기도 했고, 또 포괄적인 학습 환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 자원, 노력을 과소평가했다. 이 여정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취약함, 그리고 타인과 감각을 공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불확실한 학교>의 코디네이터 서새롬은 이 프로젝트의 불안정적인 본질을 조명할 만한 심보선의 시 한 편을 추천했다.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

그런 것을 언제까지고 반복해보고 싶다.[8]

이 시 구절을 영어로 직역하면 “Accompaniment that has nothing to do with the precedence. / I want to repeat it indefinitely.”가 된다. 그러나 번역에서 사용된 단어 ‘accompaniment (동행)’은 함께 걷는다는 것의 시적인 의미, 즉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여정의 상징을 포착하지 못한다. 이 시 구절의 아름다움은 ‘선행(先行, 앞서 일어난 일)’과 ‘선행(善行, 좋은 행위)’ 두 가지 의미를 연상시키는 동음이의어 ‘선행’에 있다. 그래서 이 시 구절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을지라도’ 또는 ‘걸어가는 것이 곧 선행(善行)을 의미 하지 않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런 것을 언제까지고 반복해보고 싶다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 참가자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이런 프로젝트를 하고 나는 나를 위해 여기에 참여하는 게 좋다”고 말했을 때처럼 기분 좋은 순간도 있었다. 이 말은 이 프로젝트가 그들을 도와주거나 힘을 실어주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님을 그 참가자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이 작업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공동 학습(co-learning)’에 관한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참가자들을 <불확실한 학교>의 중심으로서 존중했다. 그리고 두 달 여 간의 프로그램 기간 동안 참가자, 협력자, 팀원,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이가 점점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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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이상 예외는 없다

나는 <불확실한 학교>를 장애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공간으로 상상했다. 우리는 포괄적이고 수용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를 둘러싼 온실의 바깥에서, 나는 한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편견과 미세한 적대감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참가자들과 이러한 사안에 관해 오래 토론을 했다. “장애는 사회적 구성물인가, 물질적 실재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잠재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기능(ability)은 인간이 기존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한편 역량(capability)은 인간이 ‘일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잠재성(potentiality)은 집단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기능, 역량, 잠재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탱한다. 예술은 이러한 지지 구조물의 축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한다. 예술은 사회적 포용을 가능하게 하는 접착제이다. 예술은 공존의 시학으로 이야기한다. 즉 예술은 번역 불가능한 것을 번역해낸다.

<불확실한 학교>는 일시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지속적인 실험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참가자들과 작업하기를 바라며, 다음 기회가 허락되면 그 때는 이들을 교사로, 협력자로 초청할 계획이다. 어쩌면 2016년 여름의 <불확실한 학교>는 앞으로 다른 맥락에서 좀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이 같은 모임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준비였을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포용에 대한 요구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되지 않을 때 완성될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이 훨씬 더 많다.

 

[1]“unlearn”, 『미리엄-웹스터』, 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unlearn

[2]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의 ‘작가의 말’에서 인용, http://www.wnewhouseawards.com/christinekim.html

[3] 장 뤽 낭시 저, 박준상 번역, 『무위의 공동체 (La Communauté désœuvrée)』, 고양: 인간사랑, 2010년, 79쪽.

[4]애스트라 테일러 저, 한상석 번역, 『불온한 산책자: 8인의 철학자, 철학이 사라진 시대를 성찰하다(Examined Life: Excursions with Contemporary Thinkers)』, 서울: 이후, 2012년, 316쪽.

[5] 셀린 콘도렐리, 게빈 웨이드, 제임스 랭던, 『지지 구조물(Support Structures)』, 베를린: 슈테른베르그 출판사, 2009년, 29쪽.

[6]“불확실한 학교”, 미디어시티서울 2016, http://mediacityseoul.kr/2016/ko/project/uncertainty-school-participant-exhibition-interdependence

[7] 주디스 버틀러 저, 조현준 번역,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5년, 44쪽.

[8]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1년, 26 쪽.

 

이 글은 SeMa 비엔날래 미디어시티 서울 2016 도록을 위해 쓰고 편집했다.

이 글을 번역하신 김정혜 님, 교정과 편집에 도움을 주신 고아침, 김보라, 서새롬, 아버지 그리고 미디어시티 서울 2016의 이성민, 박은혜, 이지원, 강유미, 길예경, 백지숙 님께 감사함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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